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화도 회군 (문단 편집) === 최영의 요동 공격 의지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han-style.com/pic_choiyoung_01.jpg|width=100%]]}}} || || {{{#000000 '''[[최영]](崔瑩)''' }}} || 외교관 설장수가 명나라의 철령위 요구 지시를 전달하자, 고려는 그 즉시 바쁘게 움직였다. 5도(道)의 성곽을 수리하게 하는 한편 원수(元帥)들을 서북 국경 지대로 보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게 하면서 동시에 밀직제학(密直提學) 박의중(朴宜中) 등을 명나라로 파견하여 철령 이북이 고려의 영토임을 역사적인 근거에서 설명하도록 했다. 이와 동시에 최영은 재상들을 불러 모아 명나라의 정료위(定遼衛)를 칠 것인지, 아니면 화친을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를 벌였다. 당시 모든 재상들은 화친쪽에 찬성했고, 이에 밀직사사(密直司使) [[조림]](趙琳)이 명나라 조정으로 출발했지만 '''요동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최영은 다시 한번 재상들을 불러 모아 철령 이북을 할양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했고, 재상들은 그에 대해 반대 의견을 내었다. 이미 명나라 공격에 대한 생각이 있었던 최영은 그 이후부터는 요동 공격을 주장하는 세력의 핵심이 되어, 인척 관계를 맺은 우왕과 더불어 요동 원정을 논의했다. 우왕은 요동 공격에 대한 자문을 최영에게 구했고, 최영은 이에 대해 찬성했다. 즉 '''요동 공격이라는 정책의 핵심은 바로 최영이었다.''' 이 때문에 요동 공격을 반대하는 공산부원군(公山府院君) 이자송(李子松)이 직접 최영의 집에 찾아가 요동 공격을 만류했지만, 이미 결심을 내린 최영은 이자송을 [[빠따|곤장으로 두들겨 패서]] 유배를 보낸 다음에 '''곧 죽여버렸다.''' 요동 공격에 대한 최영의 의지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때 때마침 서북면 도안무사(都按撫使) 최원지(崔元沚)가 >"명나라가 병사 1,000여명을 이끌고 와서 철령위를 세우려고 한다." 는 보고를 올렸고, 동강(東江)에서 돌아오고 있었던 우왕은 이 소식을 듣고 >'''"내 말을 안 들으니까 이렇게 되었잖아!"''' 하고 울면서 통탄했다. 이후로 우왕은 명백하게 명나라를 적으로 인식하고 행동하기 시작했다. 이때는 마침 명나라 후군도독부(後軍都督府)에서 요동백호(遼東百戶) 왕득명(王得命)을 파견하여 철령위를 설치한 사실을 통보하였으나, 이미 명나라를 적으로 여기던 우왕은 병을 핑계로 아예 왕득명을 만나주지도 않았다. 우왕 대신 판삼사사(判三司事)였던 [[이색(고려)|이색]](李穡)이 왕득명을 만나 잘 달래었으나, 왕득명은 >"철령위 요구는 황제께서 결정하실 일이지 내가 어쩔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라고 대답했다. 심지어 최영은 여기서 한술 더 떠, 왕득명의 일로 고려에 왔던 '''명나라의 요동 병사 21명을 살해하고,''' 다섯 사람만 남겨 구금함으로써 명나라에 대한 적대 의지를 불태웠다. 고려 8도에서는 요동 정벌에 필요한 병사들이 징발되었고, 우왕은 황해도 부근으로 이동하며 사냥을 나간다는 핑계를 대고는 병력의 징발과 요동 공격에 대한 준비에 착수하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